제목
영혼 결혼식
작성자명최준렬
조회수1144
등록일2002-07-15 오전 8:36:37
후덥지근한 여름밤 공기가 무겁게 대학병원 안을 가득 메우고, 주치의들은 엄습해 오는 졸음을 쫓아내면서 차트를 정리하고 있을 때, 내과 중환자실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주치의는 총알같이 뛰쳐나가고 의대 실습생이었던 나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덩달아 같이 뛰었다.
여자 환자였다.
지금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여고생이었던가, 아니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꽃같이 아름다운 환자였다.
그 젊음으로도 당해낼 수 없을 중한 병을 앓았던 어여뻤던 환자는 며칠 째 중환자실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의료진의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그날 밤을 넘기지 못했다.
눈부시도록 싱싱한 젊은 육신에서 고독한 영혼은 순식간에 탈출해버리고 컴컴한 중환자실 창문을 빠져나가 텅 빈 도시의 밤하늘을 정처 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날 불볕 같은 태양이 내리쬐던 공사장에서 내 고향 친구는 자기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다가 후진하는 트럭에 치여 급히 전주 예수병원으로 후송했으나 그도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가족 곁에서 영원히 떠나버렸다고 했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친구,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하고 자기 아버지가 뻔히 지켜보는 공사장의 흙먼지 속에서 외마디 하나 지르지 못하고 횡사해 버렸던 불쌍한 친구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온다.
1년 전 추석 때 윷놀이를 하다가 사소한 말다툼으로 윷판을 엎어버렸던 철없던 우리들.
그러나 그는 우리들 곁에서 떠났고, 가끔씩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마음을 잡지 못하고 술만 마셔대는 그 친구 아버지의 깊은 한을 우리는 안타까워했다.
견뎌내기 힘든 여름밤의 긴 어둠을 벗겨내고 또다시 이글거리는 태양이 도시의 눈부신 아침을 만들어내고 있을 때, 바람이 투명하고 사위가 한적한 교외의 화장터에는 두 대의 흰색 장의차가 거의 동시에 도착한다.
깊은 실의에 빠져있던 두 집 부모들은 가슴을 쥐어뜯고 있을 때, 그들의 먼 친척들은 구천을 외롭게 맴돌고 있을 총각 처녀의 영혼을 걱정하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했을 나이였겠는가.
가슴 조이고 설레면서 그 해 여름만큼이나 뜨거운 사랑을 한번이나 했겠는가.
그들에게 몇 년을 기다려도 좋을 사랑하는 연인의 영혼이라도 하나 있었을까.
한스럽고 고독한 젊은 영혼들이 오죽했으면 한을 품어 어렸을 때 우리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총각 처녀귀신으로 불려졌을까.
이 지상에서 해보지 못한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을 가족들은 못내 아쉬워했을 것이다.
거의 같은 시간에 화장터에 도착한 것도 인연이라고 그들의 부모들은 두 영혼을 결혼시키기로 짧은 시간에 합의했다.
며칠 후, 양측 부모 앞에서 내 친구와 내가 지켜봤던 그 여자 환자는 지푸라기로 만든 모형으로 환생을 하여 결혼식을 치렀다고 시골에 계신 나의 작은 아버님이 말씀해 주셨다.
이미 흰 연기로 산화해 버렸던 두 사람의 육체 대신 지푸라기 모형에 화사한 한복을 입히고 전통 혼례식을 올렸을 때도 그 둘 사이에 술잔이 오고 갔단다.
양쪽 들러리들은 짚으로 만든 두 사람의 허리를 꺾어 절을 시키고 술잔을 나누어 마시게 했다.
그들은 아마 지금쯤 아무런 고통도, 어떤 빈곤도 없는 저 세상에서 우리들이 상상도 못할 달콤한 신혼여행과 결혼생활을 즐기지 않았을까.
그 후 내가 고향에 갔을 때, 죽은 친구네 토담집 안방 벽에는 결혼식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었다.
양측 집에서 가져온 두 사람의 사진을 어떻게 정교하게 합성했는지 살아 있을 때 그 모습 그대로 다정하게 곁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사진 찍는 순간의 행복한 웃음에 배어 나오는 듯 했다.
살아 있을 때의 두 사람을 다 보았던 유일한 나는 결혼식의 증인처럼 그 둘의 행복을 빌었다.
빈곤도 질병도 없는 세상에서 풋풋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깔깔거리며 영원히 나눌 수 있기를 마음 깊이 기원했다.
어느 틈엔가 방안에는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만약 내 친구가 살아있었다면, 저렇게 예쁜 부잣집 여자를 색시로 맞아들일 수 있었겠느냐며 참 장가 한번 잘 갔다고 한마디씩 했다.
- 세상을 임신한 남자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