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은장도
작성자명최준렬
조회수1247
등록일2002-07-02 오전 2:43:26
밤안개 자욱한 마을 어귀에서 들려오던 개짖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담을 넘는 검은 그림자.
거칠게 문이 열리고 소스라치게 놀란 여인의 외마디.
더듬거리듯이 무언가를 찾아 단단히 움켜쥔 손. 조금 열려진 문틈으로 스며든 달빛에 번쩍 비친 서늘한 칼끝.
마침내 야수의 심장을 향해 통렬히 꽂히는 은장도.
그 은장도를 지금도 지니고 다니는 여자가 있을까.
아니, 과년한 딸에게 고이 간직해야 할 순결의 의무를 지워주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서 은장도를 품속에 넣어주는 그런 어머니가 우리 곁에 있을까.
초등학교 2,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아침, 마을 공기가 흉흉해지고 동네 어른들은 귓속말로 밤새 일어난 무언가를 열심히 전하고 있었고 그 표정들은 굉장히 놀라는 것들이었다.
아무리 은밀하게 어른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고가도, 어린 우리들에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 꽤 정확한 정보가 흘러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이웃마을 우물가 옆집에는 숙성한 처녀가 있었고, 옆마을 총각과 은밀히 연애를 하고 있었다.
어떤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처녀는 밤새 농약을 먹고 죽었다는 것이다.
오후 하교길에 우리는 그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마을의 나이 드신 아저씨 한 분이 멍석에 그 처녀를 둘둘 말아 가지고 지게에 얹혀 동네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우리들은 철없이 처녀귀신 이야기를 했었다.
처녀귀신은 온갖 나쁜 일로 살아있는 사람들을 괴롭히기 때문에 처녀가 죽으면 사람들의 통행이 가장 많은 삼거리에 묻는 거라고 했다.
죽은 처녀를 눕혀놓고 그 얼굴 위에 체를 올려놓은 다음에 흙을 덮는다고 그랬다.
그 이유는 처녀귀신이 그 체의 구멍의 개수를 다 세고 나면 지상에 나오기 때문이었다.
체의 구멍의 수를 세다가 사람들이 삼거리를 지나면서 체를 밟고 지나가면 구멍으로 빠져 나온 흙가루가 처녀귀신의 눈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그때까지 헤아렸던 구멍의 숫자를 잊어버려 처음부터 다시 세어야 하는, 마치 시지프스의 신화 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등교길에 있는 삼거리를 생각해보고 그곳에 죽은 처녀를 묻으리라고 우리들은 믿었다.
나는 지금 그 처녀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도 전혀 아깝지 않은 아름다운 사랑을 했었을까?
아니면 잃어버린 순결로 그 당시의 관습이 그녀를 죽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은 혹시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자살을 한 것일까.
그 당시의 완고한 관습이 저지른 타살(?)일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나는 전자이기를 믿고 싶다.
아침마다 제주도 호텔 옥상에 올라가면 담배꽁초가 수북히 쌓여 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어느 산부인과 여의사는 자신의 책에서, 요즈음 순결의 의미는 성경험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임신한 경험이 없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바뀌어진 듯하다고 말한다.
이제 더 이상 색바랜 순결교육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피임교육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할 때라고 신세대들의 성 풍속도를 그리고 있다.
토요일 오후의 한가한 진료실에 봄햇살처럼 아름답고 싱싱한 여자가 약간은 화가난 듯한 얼굴로 들어섰다.
지금 문밖에 자신과 곧 결혼할 사람이 와 있는데, 그 남자가 자신의 처녀성을 의심한다는 것이다.
억울하고 화가 나서 지나가다가 마침 눈에 띈 우리 병원에 들어온 것이다.
남자를 진료실로 들어오게 했다.
나는 결혼을 하기로 한 사람을 의심한다는 것은 커다란 실례이고 또 그런 남자의 사랑이 의심스럽다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원한다면 내가 본대로 말해줄 수 있고 했다.
여자도 그렇게 하길 바랬다.
검진대에 올라간 여자의 온전한 처녀막을 확인하고서 그 남자에게 당신은 요즘 남자로서 참 행운아다.
요사이 보기 드문 이처럼 순결한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으니 아마 당신은 행복할 것이다라고 말해주었다.
그 순간 남자의 행복한 표정은 어떻게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올 여름 수영장에서 두 명의 날씬한 아가씨를 수영 지도하던 젊은 남자 코치의 비굴스러울 정도로까지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면서 갑자기 내 진료실을 찾았던 그 남자의 표정이 떠올랐다.
아마 그 남자는 제주도 신혼여행 중에 호텔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지 않았을 것이다.
괌여행 중에 가이드는 우리들에게 밤에 원주민 여자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괌의 원주민 여자들은 한국 남자들을 좋아해 이따금 겁탈을 한다고 했다.
이제는 불타오르듯이 피는 열대의 후끈한 꽃나무 밑에서, 서서히 태풍을 만들어 가는 구름들 사이로 언뜻언뜻 얼굴을 내미는 달빛에 섬광처럼 번쩍이는 서늘한 은장도가 남자들의 손에 들려있을지 모를 일이다.
- 세상을 임신한 남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