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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씨앗

작성자명최준렬
조회수949
등록일2002-06-11 오전 9:31:29
  여자인 당신에게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렇다고 모든 여자가 다 그렇다거나 또 당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니까 차분하게 대답해주리라 믿어요.

글쎄 며칠 전 20대 중반의 미혼인 여자는 나에게 아주 당돌하게 그리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상담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치료를 부탁하는 것도 아닌 무슨 선전포고처럼 내 앞에서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말하더라구요.

물론 나에게 대답할 여유를 주지도 않았고 도대체 나에게 왜 왔는지 모르고 속수무책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는데요, 옆에 있는 간호사도 진료실 밖으로 나가 있기를 그녀가 원했어요.

그런 후에야 그녀는 자신이 아주 여러 차례 임신중절 수술을 받았고, 그래서 다시 한번 인공유산 수술을 하면 영원히 임신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지금 뱃속에 있는 아기를 지우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글쎄 지금 뱃속에 있는 아기는 곧 결혼할 남자의 애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에게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그녀가 왔을까요.
갑자기 나는 아무런 예습도 없이 맞닥뜨린 어려운 수학문제처럼 어리둥절했을 뿐이었지요.
충격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고 한동안 나는 내 생각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고, 단지 쥐고 있던 볼펜 끝을 차트 위에 콩콩 찍어대면서 그녀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지 않았어요.

마치 내가 그녀의 남편이 될 남자처럼 갑자기 억울하기도 했고 또 분했었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거예요.
어쩌면 저럴 수가 있을까.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그녀 입장에서 생각을 다시 하기로 했어요.

또 한번의 유산 수술로 평생 자신의 자궁이 다시는 어느 생명 하나도 키워내지 못하는 척박한 텃밭으로 남아 있다면 얼마나 큰 고통이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씨앗을 뿌리고 싹이 돋아나기를 한없이 기다리는 새신랑의 그 쓸쓸한 기다림은 얼마나 헛헛하겠는가.

지금 뱃속에 있는 아이의 소중한 생명에 대해서 먼저 말하지 않은 것을 당신이 책망하시는군요.
그래요, 어디서부터이든 여자인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어요.
그렇다고 자신의 신부가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다른 남자의 정자를 받아 생긴 아이를 무슨 혼수품처럼 뱃속에 가지고 온다면 당연히 기뻐해야 한다고 말하진 않겠지요.

그녀가 나를 찾아온 것 자체가 잘못이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복잡한 고민과 결정은 정작 산부인과 의사의 몫이 아닌지도 몰라요. 나를 잘못 찾아온 거지요.
차라리 성직자를 찾아가 그 분의 혜안에 어린 조언을 들었어야 했어요.

그녀의 이야기가 결코 장황하거나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하면 자신은 임신을 했고 그리 오래되지 않은 초기 임신이라는 것과, 그 태아가 곧 결혼할 남자의 아기가 아니다는 아주 간결한 이야기였어요.

그녀의 문제는 너무 자주 임신중절 수술을 해서 이번에도 유산시키면 불임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아주 짧은 이야기를 당신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대답을 주저하시는군요.

그럴 땐 쉽게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면 당신이 그 여자의 처지에 처해있다고 가정을 하고,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하면 돼요.

내가 너무 당신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는 것 같군요.
꼭 대답해야 할 의무가 당신에게 지워져 있는 것처럼 말한다고 몹시 화를 내시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미안해요.
단지 그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물어본 게 아니라, 같은 여자로서 당신이 그런 처지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를 물어본 겁니다.

아니, 나를 찾아온 환자를 위하여 내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를 당신이 가르쳐 주었으면 고맙겠다고 표현하는 것이 당신에 대한 예의 같군요.
그래도 당신은 표정이 밝아지지 않아요.
단지 같은 여자라는 이유로 그런 고민을 왜 당신이 해야하는지 화가 난다면 어쩔 수가 없어요.

나 또한 그녀의 새신랑이 아니다는 이유로 고민하지 않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말이지요,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 아버지의 혈액형과 곧 결혼할 남자의 혈액형이 같고, 지금은 임신초기이며 곧 결혼식을 올릴 것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자신의 결론을 스스로 말하면서 여자는 진료실 문을 열고 바람보다 더 가볍게 나가버리는 거예요.

                     - 세상을 임신한 남자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