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남자로 말해져요.’
술에 촉촉이 젖은 여자 목소리가 스크린 위에 더빙된다. 오래전 우리나라 영화에 나오는 대사다.

그렇다면 남자는 무엇으로 말해지는가.
대부분 남자는 그가 차지한 자리로 말해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생각해 보자. 지금 당장 내가 청와대나 아니면 어느 부처의 장관 또는 검찰의 요직에 앉아있다면 나를 보는 주위사람들의 태도나 눈빛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런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만한 능력과 노력에 의해 응당히 그런 대우를 받지만 그렇다고 고위직에 앉아있지 못한 많은 사람이 그만큼의 능력과 인격이 부족한 것만도 아니다.
같은 능력이 있으나 자기가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또 기회가 오지 않아 다른 자리에서 훌륭하게 봉사하는 사람들도 많다.

같은 의사들도 그러한 경우를 많이 겪게 된다.
유명한 대학병원 아니면 거대한 종합병원에 앉아있는 의사들은, 물론 그만한 자리를 차지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학문적 업적과 연구, 그리고 의술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조그만 의원을 개업하고 있지만 종합병원에 있는 의사들 못지 않은 실력을 갖춘 분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그가 조그만 평수의 개인의원에 앉아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환자들에게 쉽게 무시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한 번 보지도 못한 환자가 종합병원으로 가기 위해 진료의뢰서를 써달라고 강요할 때는 처참하기까지 하다.

몇 년 전에 나는 분만실 앞에서 젊은 남편을 만났다.
임신부의 배는 정말 남산만했고 내진시 골반은 협골반이었다.
초음파검사상 태아는 4.5Kg이상의 거대아였다. 태아의 머리는 골반내 진입하지도 않고 둥둥 떠있는 초산모였다.

그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설명하고 도저히 질식분만이 불가능하니 분만방법을 제왕절개술로 바꿀 것을 권유했다.
내가 진실 되지 않게 보였는지는 모르지만 종합병원에 가서 질식분만을 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그러나 몇 번을 망설이다가 그 보호자는 불쑥 수술비를 줄 테니 질식분만을 해달라고 했다.

순간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실로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고 말살하는 참을 수 없는 폭언이었다.
그와 동시에 내 눈에서는 살기가 느껴지는 비수의 섬광이 빛났음을 그의 흠칫거리는 표정에서 보았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크게 숨을 몰아 내쉬는 분만실 앞 복도는 결전의 시간이 임박한 사각의 링처럼 조용했다.

그 남자는 자신이 쉽게 뱉어낸 말속에 어떠한 흉기가 숨어있었는지를 뒤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자신은 생물학과 출신인데 대학에 다닐 때, 의예과 친구들에게서 그즈음 산부인과에서는 정상분만비가 턱없이 싸서 제왕절개술을 쉽게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허겁지겁 변명을 하였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그것은 온전히 나 자신의 문제였다.
아무리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기는 했지만 그 모진 말을 듣고 내가 수술을 한다면 돈에 눈이 멀은 속도 없는 의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그 모욕적인 말에 대한 보복으로 그 환자를 종합병원으로 보내야 하는가의 갈등이었다.

그러나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분만실 안의 산모는 밖의 대화를 엿들었는지 나에게 몇 번을 진실이 담긴 사과를 했다.
10개월 동안 나를 믿고 산전진찰을 받았던 임신부의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을 보고 나는 그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차마 팽개칠 수가 없었다.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던 그 남편에게 태어난 아기를 보면 당신은 나에게 얼굴을 똑바로 들 수 없을 거라고 기어이 한마디하고야 말았다. 4.6Kg이나되는 거대아를 안아본 그 남자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과를 했다.

실제 산부인과 책을 보면 제왕절개술의 적응증은 일반적으로 분만이 더 지연되거나 태아나 산모 또는 양쪽에 심각한 손상을 주거나 질식분만이 안전하게 진행될 것 같지 않은 경우로 말하고 있다.

지난 20년간 미국 등 선진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제왕절개술의 비율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러한 급격한 증가의 원인은 분만 횟수의 감소에 따라 임산부의 반 이상이 초산부이므로 초산부에서 발생률이 높은 난산, 임신중독증에 의한 제왕절개술의 빈도가 증가했고, 노령임산부의 증가도 그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둔위(꺼꾸리)의 제왕절개술을 통한 분만이 증가하였고, 반복 제왕절개술의 증가, 의료분쟁에 대한 관심의 증가도 한 원인이 되고 있다.
대부분의 산부인과 의사들은 자신의 경험과 양심에 의해 분만방법을 결정하지 돈에 눈이 어두워 쓸데없는 수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 떡두꺼비같은 아들을 안고 퇴원했던 부부가 얼마 전 두 번째 아기를 분만하러 나를 찾았을 때야 비로소 나는 그 남편을 용서했고 그 긴 싸움에서 나는 그를 기어이 이겼다는 생각을 속좁게 했다.

                - 세상을 임신한 남자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