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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의 장미

작성자명최준렬
조회수1078
등록일2002-05-17 오전 6:16:49
  나에게도 기다려지는 환자가 있다.
어느 날 문득 어떤 환자가 생각나고 왜 병원에 올 때가 되었는데 오지 않을까 하고 있으면 텔레파시가 통한 것처럼 그 환자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가 있다.
그날 하루의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즐겁고 때로는 휘파람이 절로 나온다.
누군가를 보고 싶고 기다린다는 것은 하루의 삶을 활기 있게 한다.
꼭 연인들의 가슴 떨리는 만남이 아니어도 그냥 만나면 좋은 그런 사람들이 있다.

젊은 여자 환자들의 건강하고 예쁜 웃음이 좋다.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도 교양을 잃지 않는 그들과 마주하고 있으면 나도 그 또래가 된 것 같은 풋풋함을 느낀다.

오후 진료시간은 폭풍이 지나간 뒤처럼 조금은 평온하다.
그런 시간에 찾아온 그 남편의 부인 또한 기다려지는 환자 중 하나였다.
10개월의 산전진찰을 받고 정상분만 후 퇴원했던 산모의 잔잔하면서도 싱그러운 미소를
지금도 기억한다.

남편을 만나기 전에 간호사가 황급히 들고 온 차트며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님을 예감했다.
아기의 혈액형이 자신과 부인의 혈액형과 맞지 않는다고 길길이 뛰는 남편을 만나기 전에 나는 산모를 먼저 만나야 했다.

창백한 산모의 얼굴을 보면서 어찌된 일이냐고 그 의문의 진실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젠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그녀만의 비밀을 말해야 한다고 그녀의 눈을 응시하면서 재촉했다.
시간을 끌면서 조용히 해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친정식구들과 곧바로 상의하라면서 산모를 내보내고 남편을 불렀다.

노기등등한 남편에게 우리병원에서 검사했던 신생아의 혈액형검사가 틀릴 수도 있다.
그러니 내일쯤 종합병원에 가서 혈액형검사를 다시 해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고 다독거렸다.
진실은 분명 밝혀지겠지만 조금이라도 늦게 밝혀졌으면 하는 바램은 왜일까.

며칠이 지난 후 그 산모는 얼굴이 말 그대로 반쪽이 되어왔다.
친정식구들과 상의 후 남편에게 사실을 말했다고 한다. 그 아이는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 결혼 전부터 알았던 다른 남자의 아기라고.

역류를 모르는 인생에서 그래도 자기 삶의 어느 부분으로 되돌아가 그때부터 다시 살고 싶은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짜를 보면서 왜 그때 솔직하게 나와 그 문제를 상의하지 않았느냐고 묻듯, 신경질적으로 차트 앞장을 볼펜으로 두들겼다. 그러나 모두가 지나간 일이다.

앞으로의 일이 문제다.
나를 찾아온 것은 분명 나에게 무슨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다.
뭔가를 도와주고 싶다고 친정오빠처럼 말했다.

그 사실을 말할 때부터 남편에게 이혼을 하자고 했고, 많은 고민을 했던 남편은 의외로 태어난 아이와 같이 그냥 그대로 살자고 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럴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고, 만약 자신과 꼭 같이 살기를 원한다면 아기를 다른 사람에게 입양시키자고 말했다.

바로 그때가 ‘수잔 브링크 아리랑’인지 하는 타이틀로 해외 입양의 문제점을 어느 TV에선가 방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해외 입양은 싫고 국내 입양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 한가지 문제점은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아들을 본 아빠가 너무 기뻐서 동사무소에 가 곧바로 출생신고를 마친 뒤였다.
이미 출생신고가 되어 법적 부모가 멀쩡히 있어 입양단체에서도 난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아기를 입양시키고, 이곳을 떠나 멀리 가서 지난날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살고 싶다고 했다.
다 말라버려 남아 있을 것 같지 않던 눈물을 애써 감추며 반쪽이 되어버린 수척한 몸을 돌려 나가던 그 산모도 내가 열 달 내내 기다리던 나의 환자였다.

꽃잎은 져도 오래 남아 있는 장미의 가시처럼 앙상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은 왜 오랜 기간동안 나를 기다리게 했느냐고 묻고 싶었다.
혹시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아닌 나에게도 장미가시의 아픈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세상을 임신한 남자 - 중에서